제주, 2019년 11월 24일 려행

2019년 11월 24일(일)

며칠 째 다른 곳에 나와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려니 요일에 대한 감각을 잠시 잊었다. 민박집 사장님 내외가 추천해 주신 대수산봉(큰물메오름)에 올라,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는 걸 난생 처음 바라보려고 했는데, 비가 방해를 했다. 아침까지 비가 와서 해돋이 인상은 포기. 마치 친척집에 놀러온 것처럼 사모님과 아침도 함께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슬슬 나올 준비를 했다.

다행히도 아홉 시가 되니 비가 그쳤다. 사장님이 혹시나 내가 탈까 해서 준비해 둔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아직은 어린 고양이가 외로웠는지, 가만히 있으면 다가와서 자꾸 바지 아랫단을 물고, 대문 밖을 지나서 나올 때엔 전봇대 근처까지 따라와서 나를 배웅했다. “오빠 이따가 올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왔다.

자꾸 바짓단을 깨문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비는 한두방울 떨어졌지만, 이 정도로 자전거 질주를 멈출 순 없다. 일단 성산일출봉으로 향해서 가는데, 광치기 해변 입구에 교통사고가 있었다. 양쪽 방향에서 달리던 차들이 서로 충돌한 것 같은데, 상당히 빠르게 달린 것 같다. 사고 현장에 있는 경찰들은 일출봉 방면에서 나오는 자동차들의 음주운전 단속을 한다.

자전거에 자물쇠가 없어서 일출봉까지 오르지는 못하고, 성산포에서 돌아서 야트막한 올레길을 질러서 바닷가 길을 따라 섭지코지로 향했다. 계속해서 흐리고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진다. 그래도 날이 흐리니 덥지 않아서 좋다. 첫날, 그리고 이틀째와 같은 날씨였다면, 자전거로 돌아다니기에 꽤나 더웠을 것 같다.

안개에 싸인 성산일출봉


빗방울이 날렸다.

자전거로 이동하는 동안에 전반적으로 이동 차량이 많지는 않았는데, 섭지코지 주차장엔 차량이 빼곡했다.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몰고 온 버스들도 있었고. 점심은 주차장 앞에 있는 휴게소에서 한치빵과 옥수수로 해결하고, 오늘 하루 나의 애마가 된 녀석을 끌고 올라갔다가 왔다. 계속 계단길이 있어서 등대까지는 가 보지 않고 왔던 길로 돌아오다가 옆으로 리조트 단지가 보여서 들어갔다. 중국 자본으로 지은 건물들 같은데, 외관은 상당히 낡아 보이고, 투숙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주 띄엄띄엄 주차된 차량이 보였다. 잠시 길을 따라 돌다 보니, 섭지코지 등대섬이 가까이에 보였다. 뒤에서 이쪽으로 연결되나보다.

섭지코지 설명서


섭지코지 등대


한지빵, 맛은 평범했다.

작년에 사이버강의에서 보았던 안도 다다오의 유민 미술관이 여기에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민 미술관과 근처에 있던 건출물들이 모두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건축물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하니 다시 생각하게 된다.

유민미술관


안노 다다오의 작품에 이 날의 애마를 끼워넣었다.

시간은 아직 오후 한시.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날이 계속 흐려서 숙소 가까이에 있는 대수산봉으로 향했다. 자전거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올라간 오름에서 본 전망은 좋았는데, 안개 때문에 선명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래도 성산일출봉과 그 너머의 우도, 그리고 섭지코지까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아침에 와서 해 뜨는 걸 보면 멋질 것 같다. 오름 정상 부근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잠시 들렀다 가면서 전날 ‘따라비오름’을 다녀왔는데, 여기보다 멋지다고 추천하고 가셨다. 갑자기 가봐야겠다는 욕구가 꿈틀꿈틀. 그런데 너무 멀다. 한라산 서쪽 끝자락으로 한참 달려야 한다. 그래도 가보고 싶었다.

대수산봉 정상, 높진 않다.

이제 해안가 도로가 아니라 내륙 도로로 자전거를 몰았다. 차가 간간히 지나가고, 자전거는 나 혼자뿐이었다. 역시나 난 길치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카카오맵으로 확인하고 달렸는데, 중간에 다른 길로 몇 번 샜다. 완전히 다른 방향은 아니었지만, 나의 공간 지각 능력은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재확인했다. 달리는 동안 차츰 하늘이 개면서, 흰 구름 사이로 예쁜 하늘이 보였다.

따라비오름을 찾아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서 오르막길에 속도가 떨어지며 오뚜기 물류센터 근처를 지나는데, 저 너머에 풍력발전기들의 바람개비 날개가 열심히 돌고 있다! 자석의 힘에 끌려가는 철조각처럼, 옆길로 빠져서 풍력발전기들을 찾아갔다. 하늘이 점점 예뻐지고, 바람으로 유명한 제주도의 바람을 맞아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커다란 날갯죽지들을 코 앞에서 보았다. 우리회사도 한 때 풍력 사업을 벌이다가 접었고, 나도 한 때 풍력발전사업 부서에서 일을 해보고 싶어해서 그랬는지, 풍력발전기들을 보면 반갑고 바람개비 날개 뒤에 달린 터빈에 써 있는 제조회사 이름을 찾아 본다.

억새밭과 바람개비들

어느덧 네 시가 넘어서 슬슬 해가 도망치려고 하는 기색을 보인다. 여기에서 오름까지 가서 올랐다가 돌아오려면 이미 어두워져 있을 것 같다. 해안도로와 달리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는 내륙 구간에서 밤에 자전거를 몰고 다니기엔 겁이 나서 방향을 돌려 숙소로 돌아가려고 큰 길가로 나왔다. 한라산 자락으로 더 올라가지 않아서인지, 제주도의 도로는 대체로 평탄해서 페달을 많이 밟지 않아도 자전거가 잘 굴러간다. 가는 길에 승마장이 곳곳에 보였으나, 그 앞을 지날 때엔 말의 향기가 느껴졌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 해 떨어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했다.

사흘째 빡세게 걷고 달렸다. 숙소에 들어와서 씻고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지금은 비수기이고 일요일 저녁이니, 성산일출봉 근처로 가면 손님이 많이 빠진 식당들이 친절하게 대해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삼십여분 거리에 있는 식당가로 향해 숙소를 나섰다. 그러나 길을 따라 가면서 길 건너에 오리해장국 7,000원이 눈에 띄었고, 조금 더 가니 말고기집이 보인다. 그래. 말고기에 도전! 용기를 내어 들어가서 메뉴를 보니 말육회비빔밥이 있길래, 말도 육회로 먹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해서 육회를 하나 달라고 했다. 그냥 먹기엔 적적해서 한라소주 17도짜리를 한 병 시켜서 홀짝홀짝. 식당에서 혼자 소주를 먹는 건 처음이다. 말고기라고 해서 소고기와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별다른 차이는 못 느끼겠더라. 이게 말고기라는 얘기를 안 하고 그냥 먹어보라고 한다면, 소고기 육회라고 생각할 것 같다. 어쨌든 대화 상대 없이 혼자서 소주 한 병은 무리여서, 반 병 정도 남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식용으로 먹는 말은 3년 이내의 어린 말이라고 한다.

말고기 육회와 순한 한라소주

고양이가 나를 반긴다. 의자에 앉아있으니, 무릎 위로 올라와서 안기며 옷을 자꾸 물어서 침으로 적신다. 이거 입고 자야 할 옷이니까 이제 그만. 일부러 떼어놓았지만, 안으로 따라오고 싶어하는 고양이를 밖에 세워두고 혼자 들어와서 미안했다. 이 녀석이 자꾸 외로워 보인다. 우리집이 아니라서 같이 잘 수는 없잖아.

냐아옹. 미안해. 밖에 두고 나만 들어와서.

독서통신 교육 도서를 읽으려고 가져왔으나, 역시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휴대전화 게임을 하다가 잠을 청했다.

숙소-일출봉 우회-성산포-섭지코지


섭지코지-대수산봉-따라비오름 가던 중 회차


도로 따라 숙소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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