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2019년 11월 23일 려행

2019년 11월 23일(토)

내가 토요일 아침에 이렇게 부지런하다니! 평소 출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가볍게 씻고, 숙소에서 제공한 떡만두국을 먹고, 여섯 시 반에 나와 다른 여성분 한 명을 관음사길로 데려다 줄 차가 출발했다. 10분 정도 걸려서 관음사 탐방로 입구에 도착했다. 일곱 시가 가까워지니 이제 슬슬 밝아지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몸은 가볍지 않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인증샷!

살살 오르기 시작했다. 혼자 온 여성분들이 제법 있는데, 다들 잘 오르고 있다. 가는 길에 말동무라도 해보고 싶었는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각자 오르다가 중간 중간에 마주칠 때에는 조용히 스쳐 지났다. 물론 인연을 만들어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여기에 온 건 아니었지만, 내가 소극적인가 보다. 다른 사람들도 누군가가 말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나도 마찬가지였고.

오르다 보니 힘들다. 그래도 날씨는 몹시 좋고 따뜻했다. 오르는 동안 땀도 조금 흘렸다. 처음 계획대로 짐을 바리바리 챙긴 배낭을 매고 왔다면 금방 퍼져서 맛이 갔을 것 같다. 그래, 그 생각은 미친 짓이었어.

빡세지기 직전

관음사길로 오르다가 중간에 삼각봉 대피소가 있었다. 대피소 뒤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봉우리가 하나 보이고, 앞으로는 절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서 내 눈높이 아래에 있었다. 말 그대로 雲海를 보고 있었다. 구름이 청명한 하늘을 갈라놓고, 그 아래에 있는 마을 사람들에겐 맑은 하늘을 숨기려고 했겠지. 혼자 온 여성분이 셀카를 찍고 있길래, 서로 사진 찍어주기 했다.

그야말로 雲海


여기가 삼각봉?

다시 본격적으로 힘들어지는 빨간색 탐방로 구간에 접어든다. 힘들어서 자주 쉬었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준 여성분을 중간에 몇 번 만났는데, 경치가 좋은 곳에서 만나면 다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같은 길이지만 다시 각자의 길로 떠났다.

한참을 오른 것 같은데 1,600미터, 1,700미터, 1,800미터… 겨우 백미터씩 높아지고 있었다. 정상이 머지 않은 것 같은데, 참 오래 걸린다.

힘들다. 그래도 드디어 정상. 관음사길엔 오르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백록담이 한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백록담이라고 글자가 새겨진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성판악길 끝자락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백록담 글자가 새겨진 바위에서 인증하려는 행렬. 人山雲海다.

전날 왔던 등산객들은 안개(구름) 때문에 백록담을 잘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난 운이 좋은가 보다. 작년 추석 연휴엔 백두산 천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고, 이번엔 백록담도 맑은 날에 볼 수 있으니. 그러나 아쉽게도 세 번째로 방문한 이번 백록담은 여전히 부끄러웠는지, 나에게는 물이 찬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메마른 백록담

하늘과 한층 가까워진 느낌, 차갑지만 신선한 바람, 그리고 마침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발 아래로 보이는 구름들은 여전히 바다처럼 보이고, 그 너머로 보이는 파란 바다. 역시 이런 맛에 산을 오른다. 맑고 깨끗한 하늘은 사진을 예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다.

줄 서기 싫어하는 나는 바위 대신 나무에서 인증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다니다가, 오르는 길에 중간중간 만나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던 일행 아닌 일행(?)과 함께 숙소에서 아침에 챙겨준 주먹밥을 먹고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성판악길로 하산한다. 성판악길엔 여전히 오르는 사람이 많다. 십여 년 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 김삼순이 한겨울에 성판악길로 한라산을 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오르는 동안에도, 내려오는 동안에도 역시 이 길은 재미가 없지만, 등산객들에겐 인기가 좋은가 보다.

정상에서 막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벌써 오른쪽 허벅지가 찌릿찌릿하다. 맙소사! 어제 좀 많이 걷긴 했나보다. 벌써 이렇게 이상이 올 줄이야…… 뒤에 내려오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먼저 보내면서, 절뚝거리며 천천히 한 걸음씩 이동해서 내려왔다. 역시 내려올 때에 다시 느꼈지만,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성판악길은 여전히 재미가 없다. 이 놈의 내리막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이쯤 왔으면 2킬로미터 정도 남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4킬로미터가 넘게 남은 상태이고 계속해서 내려가야 끝이 나온다. 하산해서 탐방로 입구에 잠시 있으니, 산행 중간중간에 만났던 여성분이 내려왔다.

실제 이동 시간은 더 긴데 트래킹 앱이 정신줄을 놓아서..

백록담에 올랐다는 사실을 인증하는 사진을 보여주고 천원을 지불하면, 안내소에서 인증서를 발급해준다. 여기까지 왔으니, 인증서를 발급받고 다시 서로의 인증샷을 찍어주고 맡겨둔 짐을 찾으러 숙소로 향했다. 내친김에 제주 시내로 나와 멜국(큰 멸치국)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각자의 숙소로 이동했다. 나는 다음날 일출을 보기 위해 성산으로 향했다. 최근에 제주도의 버스 체계를 개편했다고 하는데, 노선과 환승 체계가 상당히 잘 짜여 있다. 다만 지역에 따라 배차 간격이 길 수도 있다는 것. 시내에서 숙소까지 삽십여 개 정류장을 지나서 한 시간 넘게 이동했다.

멜국, 국물이 맑고 시원하다.

이제 밤이 되었고, 카카오맵 지도를 보며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데 골목 어귀에서 개들이 몹시 반겨(?)준다. 안으로 더 들어가기 겁나서 잠시 머뭇거리는데, 앞 집에 거주하시는 동네 주민께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어 몹시 짧은(!) 거리를 무사히 찾아갔다. 비수기라 그런지 투숙객은 나 혼자뿐이다. 인근 성산일출봉이나 오름에서 해돋이를 보고, 날씨가 좋으면 자전거를 빌려 타서 돌아다니려고 별 기대 없이 찾아온 민박이었는데, 가성비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외진 곳에 있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한적하고 평화롭다. 나처럼 번잡함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머물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가격도 저렴하고, 운영하시는 주인집 내외분도 친절했다.

독실이다. 좋다.

전날은 기숙사형 방에 네 명이 잤지만, 오늘은 그보다 넓은 온돌방에서 혼자 잔다. 후훗.




덧글

  • 이글루스 알리미 2019/12/12 08:06 # 답글

    안녕하세요, 이글루스입니다.

    회원님의 소중한 포스팅이 12월 12일 줌(http://zum.com) 메인의 [여행] 영역에 게재되었습니다.

    줌 메인 게재를 축하드리며, zum 메인 페이지 > 뉴스 하단의 여행탭에 게재된 회원님의 포스팅을 확인해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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