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책을 다 읽은 지는 한 달이 넘었지만, 학교를 방패로 삼아 게으름으로 무장해 오다가, 이제야 일지를 쓴다. 역시 그 사이에 책의 내용은 슬슬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라도 후기를 남겨야 나중에 다시 보면 조금이라도 원기를 회복하겠지.

같은 부서 신입 사원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이다. 올해 초에 입사한 이 친구에게 대학교 졸업 기념 선물과 지난 여름에 생일 선물을 주었는데 이렇게도 기특하게 되갚음(?)을 받게 될 줄이야....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표된 소설인데, 나에겐 작가의 이름도 낯설고 책의 제목도 낯선 이 책을 어떻게 알고서 선물로 줄 생각을 했는지는 아직 물어보지는 않았다. 일단 읽어본 뒤에 이야기하려고.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에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한 일본계 영국인이다. 1986년과 2000년에 발표한 소설들이 각각 맨부커상(우리나라엔 최근에 ‘한강’의 ‘채식주의자’로 알려진 상) 후보에 올랐고, 2017년에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인정받는 작가라고 한다. 태생은 일본인이지만 영국에서 자라왔기에, 영국화되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영향도 있었겠지. 책과는 관계없는 헛소리를 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의 한 편에는 ‘영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기에 감행한 바보들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브렉시트가 약인지 독인지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평가해야겠지만....

책의 배경도 1900년대 중반 영국의 시골 마을이다. 오랜 기간 집사 일을 해 온 ‘스티븐스’라는 남자가 새로운 집주인-‘주인’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워보이지만, 주종관계를 연상시키므로 ‘집주인’이라는 표현을 썼다-으로부터 휴가를 얻어, 인력 수급을 구실로 삼아 수십년 전에 같은 집에서 함께 일했던 ‘켄턴’양을 찾아 떠나는 엿새 간의 여정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행 중에 벌어지는 사건들보다는, 여행을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소설을 이끈다.

평생 연출자로서의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이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 회상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느리게 연주하는 고전 음악을 듣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서 책을 읽는 동안 속도가 붙지는 않았다. 그는 철저한 직업관으로 똘똘 뭉쳐, 자신의 업무에 있어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그는 주인공이 아니라 연출자 역할만 해왔다. 집사라는 직업의 사명감에 휘둘려 개인적인 욕망도 포기해 왔고, 황혼에 이른 나이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후회’는 하지 않지만 ‘회한’하기도 한다.

그는 오랜 기간 집주인으로 모셨던 존경하는 ‘달링턴’ 경의 외교 활동을 위해서 저택을 최고의 회의장으로 만들었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2차대전을 준비하는 독일 나치의 사전 포섭에 휘말린 꼴이 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회의에서 논의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면 안 되고, 오직 철저하게 행사 준비에만 철저해야 한다는 집사의 사명감만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정의 마지막 날에는 수십년 전에 욕망을 억누르고 떠나보냈던 그녀, ‘켄턴’양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결혼 후에 한 동안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 빈 자리가 아직 있어서, 이제라도 자신이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그녀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는 스티븐스의 회상을 통한 서사적 상황 설명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풀어쓰지만, 주인공의 개인적인 감정은 정말 짧고 절제된 표현으로만 살짝 보여준다.

켄턴양과의 짧은 재회를 뒤로하고, 스티븐스는 석양을 바라보며, 새로운 집주인과 소통이 가능하도록 농담의 기술을 익히겠다는 소박하지만 그에게는 도전적인, 그렇지만 여전히 직업 의식을 놓지 않은 채 이야기를 마친다.

전반적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이야기, 그리고 고지식한 주인공의 말과 행동들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던 소설이다. 어쩌면 내 모습도 이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직업은 헌법에서 정의한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행위이다. 직업은 생계의 수단이자 개인의 자아를 실현시켜주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다른 일을 한다면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언제부턴가 생일이 돌아오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기 시작했다. 나름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고, 자기 계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 책 속의 주인공처럼 과거를 회상하고 아쉬워하는 때가 종종 있다. 후배들에게는 좀 더 오래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잔소리만 늘어가는 것 같다. 이미 나도 소위 꼰대가 된 건가? 그래봤자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지금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설마,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가 이런 감정을 느껴보라고 이 책을 생일 선물로 주지는 않았겠지?

덧글

댓글 입력 영역


메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