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소녀 쟈지(Zazie dans le Métro) - 레몽 크노


1. 쟈지와의 만남


작년 가을 코엑스 지하, 점심 약속 시간이 남아서 반디앤루니스에서 책 냄새를 맡던 중 깜짝 놀랄만한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19금 금기어가 책 제목에 들어있지만,한 눈에 딱 봐도 19금 소설이 아님은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정도. 조금은 어둡지만 화려한 색상의 표지가 눈길을 끌어 사진으로 남겨두었는데, 언젠가부터 이 책이 내 머릿속의 한 곳을 오롯이 차지하고 있었다.


웹 검색 기회를 활용해보니, 레몽 크노라는 프랑스 언어 유희의 달인인 작가가 1950년대에 발표했던 소설이란다. 우리 나라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도 훌쩍 지난 2008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는, 서로 다른 언어의 차이로 인한 번역상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금기어가 포함되어야 하는 제목도 한 몫을 차지한 것 아닐까? 어떤 분의 블로그에 써 있었던 '용감한 번역자가 비겁한 출판사를 통해'(정확히는 기억 안 남) 국내에 선보였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호기심에 이끌려 큰 맘먹고 구입한 '지하철 소녀 쟈지'. 원작 그대로 제목을 직역하면 '지하철의 자지'가 되겠지?



2. 쟈지와 가브리엘, 그리고 주변 인물들

가브리엘이 주말 동안 조카 쟈지를 돌봐 달라는 누나의 부탁을 받고 기차역으로 마중 나가는 것에서 쟈지와의 만남은 시작된다. 책은 시종일관 한 편의 시끌벅적한 프랑스식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십대 초반이지만 마치 혼자서 세상을 다 살아온 듯한 어린 여자 아이의 입에서 서슴없이 내뿜는 욕설. 코미디와 SF를 넘나드는 과장된 설정을 통해 언어 유희가 난무한다.

제목은 지하철 소녀 '쟈지'이지만, 주인공은 쟈지가 아니라 외삼촌인 가브리엘이다. 이 소설에서 쟈지는 주요섭님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의 존재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제목 만으로는 ‘쟈지’라는 아이가 ‘지하철’을 타고서 한 바탕 벌어지는 일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지만, 지하철을 타는 이야기는 끝까지 한 번도 안 나온다. 파리에 와서 지하철을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쟈지, 그러나 마침 파업 기간인 탓에 지하철 역만 구경하고 실제로 타보지는 못한 채 파리를 떠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불륜을 목격한 쟈지의 비극적인 상황을 역설적으로 희극으로 승화(?)시키고, 성인 클럽에서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가브리엘라로 변신하는 가브리엘, 어느 순간부터 가브리엘을 숭배하듯이 따라다니는 관광객들, 트루스카이용과 무아크의 애정 행각 등 잇따라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로 시종 일관 독자의 정신을 빼놓는다. 등장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때로는 부조리한 현실을 시원스럽게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별다른 의미 없는 단순한 말장난을 즐기기도 한다.

3. 번역가의고심

우리말과 문장 구조부터 전혀 다른 언어로 표현된 희극을 번역하느라 고심하신 번역가의 노고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프랑스 문화를 바탕에 둔 프랑스어 유희가 녹아들어간 원문을 그대로 우리말로 직역한다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단순한 단어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번역가께서는 원문의 단어와는 전혀 다른 우리말의 단어로 치환하면서까지 언어 유희의 해학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책 뒷부분의 역자 후기에 번역가의 고충을 털어놓고 있다.그러나 이로 인해 조금은 억지스러운 표현들이 곳곳에 눈에 띄기도 한다.

4. 마치며

책 초반부에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오타가 등장하는데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금방 발견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까지 돌아보게 하는 앵무새 라베르뒤르의 한 마디를 소개하며 마친다개인적으로는 이 문장도 몹시 잘 번역한 표현이라고생각한다.

나불나불나불나불네가 할 줄 아는 건 나불대는 게 전부지.”


덧글

  • ㅁㅁㅁ 2012/01/19 12:39 # 답글

    확실히 소녀스럽진 않은 이름이네요 ㅜㅠ
  • 새벽이슬같은청년 2012/01/19 15:00 #

    이 소녀의 이름이 프랑스에서는 얼마나 흔한지는 모르겠네요. ^^
  • 재윤 2012/01/28 21:39 # 답글


    예전에 Ps1용 게임소프트
    환상수호전 외전에 "자지" 란 이름의 주요캐릭터가 등장했으며

    남자캐릭터였습니다.

    그보다 더 가까운 얘는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딸 이름 "후남이" 죠

    딸을 낳았으나 다음엔 아들! 라는 각오가 물씬 불타오르는 작명!

    프랑스에서까지도 닮은 얘를 찾아내는 쾌거!
  • 새벽이슬같은청년 2012/01/28 22:34 #

    역시 동양에서는 '자지'는 남자에 어울리는 이름인가 보네요.^^

    아들과 딸... 김희애, 최수종. 오랜만에 상기시켜 주시네요. 후남이, 귀남이, 종말이...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이름들이네요.
  • 무적방방 2014/07/04 19:16 # 삭제 답글

    결정적 오타가 먼지 궁금하네요~^^
  • 새벽이슬같은청년 2015/01/01 23:21 #

    실수인지 인위적 오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상하시는 단어일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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